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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하늘금2002 2007. 7. 12. 13:43

 

 

불국사

 

중학교 수학여행의 추억이 남아있는 곳......경주 ...어른이 되어서도 심심치않게 갈 기회가 많다.

그때야 보문단지가 없었고...불국사 앞.....민박....여관촌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경주 보문단지 보문호

 

 

 

 

 

 

불국사...................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고 경내면적은 11만 7541평이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刱)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 )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이 아름답다.

 

 

천왕문을 들어서며

불국사가 보인다.

 

 

 

 

 

 

 

 

 

다보탑...........

 

종 목 국보  제20호
명 칭 불국사다보탑(佛國寺多寶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불국사
관리자(관리단체) 불국사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석가탑.................

종 목 국보  제21호
명 칭 불국사삼층석탑(佛國寺三層石塔)
분 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불교/ 탑
수량/면적 1기
지정(등록)일 1962.12.20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
시 대 통일신라
소유자(소유단체) 불국사
관리자(관리단체) 불국사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갑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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