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금
서울성곽길2 : 사직터널~남산~혜화문 본문
성울성곽길2
사직터널 ~ 남대문 ~ 남산 봉수대 ~ 한국자유총연맹 ~ 동대문 ~ 낙산 ~ 혜화문
<2010. 12. 25(토), 맑음>
서울성곽 길을 두 구간으로 나누어 걷는다.
첫 구간이 북(백)악산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진 산성구간으로 산행 맛을 느끼며 비교적 복원이 잘되어 뚜렷한 길이었다면
두번째 구간은 남산에서 신라호텔 뒤편 신당동까지,
동대문에서 낙산으로 이어진 혜화문까지 산지로서 복원이 되어 성곽길이 뚜렸했으며,
사직터널에서 남산 입구, 장충체육관에서 동대문까지는 도시화와 이런저런 사유로 성곽은 없고
언덕위(마루금)에 들어 선 건물 주택 등을 피해 어렴풋이 길을 찾아 가는 서울 시가지 구간이다.
인왕산 줄기가 뻗어내린
성곽은 사직터널 위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 하며
터널 왼쪽 계단을 올라 .....등성이를 찾으니...곧 주택으로 길이 막힌다.
터널 위 정부청사를 지나....
등성이 가다.....약간 비켜내린 우측 도로를 따라 간다.
월암근린공원이 나오고 ......
위ㅉ족으로 성곽 복원중...........
이곳을 내려......서울시 교육청사를 지나....
삼성서울북병원 앞....돈의문 옛터가 있다.
돈의문(敦義門. 서대문) 터...........................
태조 이성계가 서울 도성을 만들 때 사대문의 하나로 지금의 사직동에서 독립문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세웠던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1413년(태종 13)에 풍수학생 최양선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어 서전문(西箭門)이라 하였다.(옛 서울고등학교 본관 서쪽)
그 뒤 1422년(세종 4)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워 이름을 옛날의 돈의문으로 고쳤으며
거기에 연유하여 세종 이후 서대문 안이 새문안으로 불리었고 지금의 신문로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예조판서 민진원의 건의로 광희문을 고칠 때, 목재를 준비하여 돈의문의 문루를 개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습니다.
돈인문 괘서 사건 이란 1860년(철종 11) 돈의문(敦義門:西大門)에 흉서가 붙은 사건을 말합니다.
|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피봉(皮封)의 전면에는 왕명을 쓰고 뒷면에는 서투른 글씨로 왕을 비롯한 몇 사람을 지적해 비난하였다.
철종의 장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이 포도청에 범인을 색출하라고 명하였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으므로,
청렴한 관리로 칭송이 자자한 좌포도대장 허계(許棨)와 우포도대장 신관호(申觀浩)를 귀양보냈다.
돈의문 옛터....자리
맞은편 도로를 따라 ......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교정 내 담벼락......옛 성곽 같다.
혹 이곳이 성곽의 흔적아닐까? 해서.......
옛 것을 간직하는...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의 노력.......
문화와 예술이 살아있는 정동거리....주변에 볼거리가 많다.
성곽은 정동교회 앞에서........배재고등학교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정동제일교회.................
1977년 11월 22일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1895년 9월에 착공, 이듬해 헌당식(獻堂式)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 무렵에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축물이다.
교회 내부는 평천장(平天障)에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고 소박하며 기단(基壇)은 석조(石造)이고 남쪽 모퉁이에 종탑을 세웠다.
건물은 벽돌쌓기로 큰 벽체를 구성하고 아치 모양의 창문을 낸 고딕 양식의 교회당이다.
1926년 양쪽 모퉁이를 넓혀 삼랑식(三廊式) 평면형으로 교회 건물을 증축하였으며
1953년에는 6·25전쟁으로 반파(半破)된 교회를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정동교회의 역사는 1885년 10월 11일,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벧엘예배당'이라는 그의 집에서,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공중예배를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이 날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세례를 받았다.
아펜젤러는 이보다 앞서 1885년 6월에 입국하였으나,
당시 조선 정부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전도사업이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아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신학문 교육부터 시작하였다.
정동교회는 1889년 한국 최초의 월간잡지 《교회》를 발간하여 자유주의 사상을 불어넣기 위해 힘썼고,
1897년에는 미국의 엡웟청년회 운동을 도입하여 청년사업을 전개하였는데,
1922년에는 한국 최초로 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는 등 선구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한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이다.
나는...그만...낙엽도 없는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다.
덕수궁...........................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6만 1500㎡. 덕수궁이란 궁명(宮名)은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讓位)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定宗)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후 태종(太宗)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昌慶宮)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도 역시 덕수궁이라 하였다.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世祖)의 큰아들인 도원군(桃源君: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婷)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世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죽었기 때문에
세자빈(世子嬪) 한(韓)씨가 출궁(出宮)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둘째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成宗)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월산대군이 사망한 후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의주(義州)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10월 한성으로 돌아와 보니 한성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되어 이곳에 행궁을 정하고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이라 하였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집은 경내가 협소하므로 계림군(桂林君:瑠)의 집을 행궁에 포함시키고
궁궐 내에 있어야 할 각 관청을 처음에는 궐문 밖에 인접하여 두었다가
점차 목책(木柵)을 넓혀 세우고 문을 달아 임시 궁성을 형성하여 여러 관청과 위사(衛士) 등을 모두 궁궐 내에 들게 하였다.
또 그 옆에 있는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의 집을 동궁(東宮)으로, 영상(領相) 심연원(沈連源)의 집을 종묘(宗廟)로 하였다.
1597년에는 담을 둘러 쌓았고, 1607년 4월에는 북쪽에 별전(別殿)을 세웠다.
선조는 1593년 10월 이곳을 행궁으로 삼은 후 1608년 2월 정침(正寢)에서 승하할 때까지 이곳에서 내외정무(內外政務)를 보았으며,
뒤를 이어 광해군(光海君) 역시 이곳 행궁의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즉위 초 이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고 종묘를 중건하였다.
또한 창덕궁(昌德宮)을 대대적으로 복구하여
그의 재위(在位) 2,3년에는 임진왜란으로 피해를 입기 전의 건축보다 더 훌륭한 법궁(法宮)을 이룩하였다.
광해군은 1611년(광해군 3)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 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하게 된 것은 1615년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삼성생명 건물 뒷편으로.........
멀리 숭례문(남대문) 재건 공사 현장이다.
옛 것과 새 것이 ....마주한 현장
종 목 | 국보 제1호 |
---|---|
명 칭 | 서울 숭례문(서울 崇禮門)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
수량/면적 | 1동 |
지정(등록)일 | 1962.12.20 |
소 재 지 |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 |
관리자(관리단체) | 중구 |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이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오전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붕괴됨. 현재 복구공사로 2012년 12월 공사완료 예정임. 서울 성곽(城郭)의 정문으로 문 이름은 숭례문(崇禮門)이며 태조(太祖) 7년(1398)에 창건된 후 세종(世宗) 29년(1447) 크게 개축(改築)되었다. 이 문은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석축(石築) 중앙에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정면(正面) 5칸, 측면(側面) 2칸의 중층(重層) 문루(門樓)를 세웠으며, 지붕(屋蓋)은 우진각지붕으로 되어 있다.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는 다포식(多包式)으로 힘이 있고 간결한 살미첨차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수법(手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수도(首都)의 성문(城門)으로 당당한 면모(面貌)를 지닌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代表的) 건축(建築)이라 할 수 있다. |
남대문 시장을 지나
남산으로 올라 간다.
남산 가는 다리위에서
보는 서울 시가지(서울역 방향)
서울역사...............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4호로 지정되었다.
대지면적 26만 9095㎡, 건물면적 1만 7200㎡, 지상 2층 지하 1층의 돌·벽돌 혼합건물이다.
경부선·경의선 등 철도 주요 간선열차의 시발역인 동시에 종착역이었으나 새로운 역사가 신축되어 현재는 폐쇄되었다.
1900년 7월 경인철도가 개통되면서 약 33㎡(10평) 규모의 목조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원래의 위치는 염천교 부근이었으며 명칭은 남대문역이었다.
1925년 9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서 르네상스식 건축물로 새롭게 신축하였고 역사명도 경성역으로 변경하였다.
당시 신축된 건물은 규모도 상당하였지만 지붕의 돔과 독특한 외관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건축 자재는 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1층 중앙홀은 바닥을 화강암으로 깔고 중벽(中壁)은 석재, 벽에는 인조석을 붙였다.
건물 안의 귀빈실 마루바닥은 모두 박달나무로 깔았고 2층에는 양식당을 설치하였다.
광복을 맞이한 뒤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개명되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역사의 일부가 파괴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
이후 서울역사는 수도 서울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남부·서부 역사를 신설, 본역사와 구분하여 사용하였다.
2004년 1월 새로운 민자역사가 신축되면서 구 역사는 폐쇄되었다.
현재 서울역사의 일부분이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2010년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되어 활용될 예정이다.
남산................. 높이 262m이다.
본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 서울에 왕도(王都)를 정할 때는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으나,
오늘날은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 되었다.
시민공원으로 개발된 것은 1910년으로,
당시 공원 표지로 세웠던 ‘한양공원(漢陽公園)’이란 고종(高宗) 친필의 석비(石碑)가 지금도 통일원 청사 옆에 보존되어 있다.
산꼭대기에는 조선시대 이래 국사당(國祠堂)·봉수대(烽燧臺)가 있었고,
임진왜란 때는 북쪽 산허리에 왜장(倭將)들이 왜장대(倭將臺)라고 한 성채를 쌓았던 일이 있었다.
또 8·15광복 전까지 오늘날 분수대 광장 주변에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경성신사(京城神社)·조선신궁(朝鮮神宮) 등이 있었다.
오늘날은 조선 태조(太祖) 때 쌓은 성벽만이 비교적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이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하고,
산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한편, 수림은 잘 보호되어 대도시 도심부(都心部)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남대문·퇴계로3가·장충공원·이태원동(梨泰院洞)·후암동(厚岩洞) 등 여러 곳으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는 산책로가 있다.
그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八角亭)과 서울 타워가 있고, 산정부 일각에는 한국의 경위도 원점(經緯度原點)이 있다.
서울 타워는 1972년 완공된 높이 236.7m의 방송국 종합송신탑으로,
탑 안에는 송신탑시설 외에 사방 60 km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남산공원의 각종 공원시설은 기타 공공시설과 더불어 공원 서쪽 구역에 집중되어 있다.
공원 서단부에는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白凡廣場)이 있고,
그 북동쪽에는 1969년 8월에 건립한 백범 김구(金九)의 동상이 있다.
맨 위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1970년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시설면적 3,702평) 건물이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유묵(遺墨)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과 휘호(揮毫) ·장인(掌印)이 새겨진 석비(石碑)가 있고,
광장 동쪽 비탈진 곳에는 총 2,500종, 1만 5000여 그루의 선인장 컬렉션 외에 200여 종,
3,000여 그루의 영산홍 동산 및 소동물원을 갖춘 남산식물원이 있다.
그밖에 후암동 쪽 순환도로변에는 시립 남산도서관,
그 정면 양쪽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동상, 부근에 소월시비(素月詩碑)가 있다.
회현동(會賢洞) 쪽 순환도로변에는 팔각정과 연결되는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다.
서울 시가지 팽창으로 교통문제를 초래하게 되어 1·2·3호 터널이 뚫려 있다.
힐튼호텔과 성곽
남산도서관과 이곳사이로 해서
계단을 올라 팔각정(남산타워)으로 향한다.
이곳 화장실 옆 계단이
남산타워로 이어진다.
부스러진
옛 성곽의 흔적
이렇게 복원되어
산등성이를 따라 남산 정상으로 향한다.
서울시가지와 삼각산 (뒤)......
앞......좌-인왕산...우-백(북)악산
계단을 따라....남산타워로 간다.
남산 봉수대
팔각정
정상을 내려와 (국가시설물 출입금지)
좌측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오다
8부 능선쯤에서 우측의 산책로 방향으로...................표지판이 안내한다.
성곽을 넘어 바깥방향으로 진행한다.
비교적 옛 모습의 축석들...잘 보존되어 있다.
나무계단을 내려와............
한국자유총연맹........경내로 들어가.....
뒤쪽 언덕받이를 향해 오르면....복원된 성곽이 보인다.
나는 신라호텔 철책에서 우측으로 언덕.... 도로를 오르니(신라호텔-서울클럽 사잇길)
이런 암문 앞에 운동기구가 있고...성곽따라 팔각정까지 다녀오며
이곳에서 성곽 밖으로 나가서 장충동 고개까지 간다.
이곳까지 갔다가...돌아나온다.
성곽은 남산에서 남소문 옛터를 지나
이곳으로 이어진다.
성곽이 신라호텔과 경계한 곳에서....
암문을 통해 외곽으로 길을 잡는다.
성곽따라 걷기 좋은
나무 데크가 장충동까지 놓여있다.
이곳 장충체육관 위...언덕에서
횡단보도를 건너.....장충동 성당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을지로에서 동대문을 향해
동대문 야구장......공사중
서울시...공사중
대한민국...공사중
청계천의 좌 우
동대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으로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낙산공원은 동대문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후 ......
언덕위 교회를 기준 오른쪽 방향....... 도로를 따라 올라간다.
이런 길이 낙산으로 이어진다.
성곽 바깥쪽............
충신동 .....성곽 안쪽
성울성곽 바깥쪽............
서울성곽 안쪽이 더 숲이 많고
복잡하지 않은 것 같다.
낙산...............
서쪽의 인왕산(仁旺山)에 대치하는 산으로,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졌다.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숲이 우거지고 약수터가 있어 아침산책길로 많이 이용되었다.
한 때 산 중턱까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지만,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철거되고 복원되었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낙산에서 혜화문 방향으로
외곽 길을 따라 내려간다.
도착지점.....혜화문...서울성곽 걷기를 끝내고
지하철 4호선 삼선교입구역에서 귀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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