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금
공주 공산성/마곡사 본문
공주 공산성/마곡사
2018. 6. 30(토, 오전 흐리고 오후 장마 폭우)
지리한 장마가 계속되는 주말이라 가까운 곳을 찾아갑니다.
예전 금강자전거길을 여행하다 금강변에 자리한 공산성을 가보고 싶었습니다만
자전거를 타고가다 중간에 내려 구경한다는게 마음에 내키지 않았을뿐 더러
시간에 쫒기는 조급한 마음에 지나치며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가보리라 생각했습니다.
공산성은 웅진백제(475~538년)의 왕성으로 금강변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은 천혜의 요새이며
백제후기(475~660년)의 문화유산으로 공주 공산성의 왕궁지와 왕궁부속시설지,
백제토성과 송산리고분군의 무덤양식과 국립공주박물관, 부여의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고분군,
나성, 익산의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합니다.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로 특히 봄이면 산수유와 왕벚나무의 꽃이 화려하다고 하며
상해임시정부의 수반을 지내셨던 김구 선생께서 청년시절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 쓰치다를 징벌하시고
이곳으로 피신하셨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침 마곡사를 찾은 이날 양산 통도사, 속리산 법주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와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7~9세기 창건 이후 현재까지 불교의 신앙, 수도, 생활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종합승원으로서
한국의 산사는 세계유산의 필수조건인 "탁월한 보편적 가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지정은 참 잘된 일이라 생각되며
예전 영주의 **사찰이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주변에 현대식 대리석 박물관을 짓는 등
세계유산에 걸맞지 않는 행태로 이를 취소당하였다는 말을 전해들었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공산정
유네스코의 백제역사 유적지구로 등록되었다 합니다.
이 유적은 표고 110m의 공산에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포곡식산성으로서 북쪽은 곧바로 금강(錦江)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공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공산성의 평면형태는 서북과 동남이 장축을 이루는 부정형으로 성벽의 전체길이는 2,660m에 달하는데, 그 중 외성으로 불리는 토성 467m를 제외하면 본성의 길이는 2,193m가 된다.
현재 성벽은 70% 정도가 석축으로 되어 있고 토축부는 30% 정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동남부 외성 부분에 대한 성벽조사 결과를 볼 때, 백제시대 성벽은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구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성벽의 규모는 지형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진남루(鎭南樓) 부근을 기준으로 하면 성벽의 기저부 폭은 4-6m 정도이며, 상부 폭은 1.5m 정도이다. 성벽의 높이는 최고지점에서 약 7m에 달하는 곳도 있으나 지형에 따라서는 2m 정도를 나타내는 곳도 있다. 한편 성벽에 가까운 내부에 호상(壕狀)의 요부(凹部)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 있는데, 이는 성벽 축조시 필요한 토량(土量)을 확보하기 위해 이곳을 굴토(掘土)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공산성에는 동·서·남·북 4방향에 각 1개소씩 모두 4개소의 문지가 시설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만이 조선시대에 건조된 성문이며, 동·서 2문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정문으로서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1920년에 해체 복원된 후 다시 1971년에 보수하였다. 공북루는 금강에 바로 인접하여 시설되었으며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1603년에 산성 수리와 더불어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서문루 3칸(西門樓三間)”, 『공주구읍지(公州舊邑誌)』에도 “동문, 서문 2층 3칸(東門, 西門, 二層三間)”으로 되어 있어 당시 문루가 존재했던 점은 확실하나 발굴조사시에 그 흔적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동문은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문지가 드러났는데 문폭이 2.46m, 통로 길이가 6.45m였으며, 문지석이 2매 남아 있었다. 1988년에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밖에 성내의 유수(流水)를 성외로 내보내는 수구문지가 저지대인 북쪽 성벽과 고지대인 동남쪽 성벽에 각각 1개소씩 시설되어 있으며, 은밀히 성외로 통하는 암문(暗門)도 1개소에서 확인되었는데 이는 금강으로 통하고 있다. 성내의 백제시대 유구로는 임류각지(臨流閣址),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 지당지(池塘址), 목곽고(木槨庫) 등이 조사되었다.
임류각지(臨流閣址)는 공산성의 동남쪽 산정상부에 위치한 광복루(光復樓) 서쪽 약 150m 지점의 산 중턱 경사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일대에서 ‘류(流)’명이 새겨져 있는 와편을 수습하면서 임류각지의 후보로 주목되어 온 곳이다. 임류각은 동성왕 22년(500)에 궁의 동쪽에 세워진 높이가 5척에 이르렀다는 장대한 누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0- 1981년 사이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 서북-동남 방향의 장축을 가진 5×6칸의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건물의 평면적은 109㎡ 가량으로서 초석배치와는 달리 10.4×10.4m의 정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 건물의 기초는 기반토를 약간 깎아내어 정지한 후 성토나 적심석 없이 생토면에 그대로 초석이나 지대석을 놓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출토유물은 와당(瓦當), 평와편(平瓦片), 토기, 자기 등인데 이 가운데 백제시대의 유물은 단판8엽연화문와당(單瓣八葉蓮花文瓦當), ‘류(流)’명 와편, 삼족토기편, 토기 뚜껑 등인데, 토기로 본 그 연대가 5세기말-6세기 전반 무렵으로 비정 가능하여 기록상의 임류각 축조연대와 거의 일치한다.
추정왕궁지(推定王宮址)는 남문인 진남루 북서편의 쌍수정 광장으로 불리워져 온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일대는 표고 85m의 고지대에 해당하며, 북으로는 금강이 잘 조망되고 남쪽으로 공주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전체 면적은 6,800㎡ 정도여서 공산성내에서는 가장 넓은 대지에 해당된다. 1985년에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 굴건식건물지(掘建式建物址) 2동, 지당지(池塘址) 1기, 목곽고지(木槨庫址) 1기 등 다수의 건조물터가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왕궁의 유허로 볼 수 있는 건물지는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인데, 그 규모는 제1건물지가 6×4칸이고, 제2건물지가 2×5칸이다.
굴건식건물지의 윤곽은 주공(柱孔)의 평면분포가 매우 복잡하여 확실치 않으나 대체로 위의 제1건물지와 평면이 조화되도록 그 북쪽과 서쪽에 각각 1채씩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와당, 평와편, 토기편 등인데, 평와편 가운데는 앞의 임류각지에서도 확인된 바 있는 ‘류(流)’명이 있는 와편도 포함되어 있다.
지당지(池塘址)는 추정왕궁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20여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 규모는 상면 직경 7.3m, 바닥 직경 4.78m, 깊이 3m의 대접모양으로서 그 호안(護岸)은 모두 석재로 축조되어 있는데, 대체로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편이다. 호안 내부에서 연화문와당, 파상문와당(巴狀文瓦當), 삼족토기, 병, 토제 벼루편, 완(盌), 등잔 등이 수습되었는데 이들 유물들로 미루어 그 시축연대는 대략 5세기 말-6세기 초로 비정된다.
목곽고지(木槨庫址)는 추정왕궁지 제1건물지의 서쪽으로 약 25m 지점에서 조사되었다. 이 목곽고는 기반토인 풍화암반토를 평면 4.6×4.2m, 깊이 약 2.9m 정도의 넓이로 굴광(掘壙)한 뒤 그 속에 3.1×1.45m 규모의 목곽을 시설한 것인데, 굴광과 목곽 사이에는 판축기법으로 흙을 채워 놓았다. 목곽의 구조는 두께 3-5㎝, 폭 13-15㎝되는 목판재를 목곽의 장·단변 만큼의 길이대로 잘라 이은 것인데 판재 사이에는 결구가 없이 목곽 4모서리와 양장변(兩長邊)의 가운데 지점에 각각 직경 24㎝ 가량의 통나무 기둥을 박아 세움으로서 판재를 지탱하도록 하였다. 조사 당시 목곽 바닥으로부터 약 0.4m에 이르는 높이까지는 참나무 목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목곽고 내에서는 연화문와당, 파상문와당 등 와당류와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그밖에 공산성 내에는 원형 또는 방형의 구덩이들도 확인되었는데, 저장혈 또는 함정들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百濟都城硏究(朴淳發, 百濟歷史再現團地造成調査硏究報告書, 考古美術分野Ⅰ, 忠淸南道, 1996년)
- 公山城 城址 發掘調査報告書(安承周·李南奭, 公州大學校博物館, 1990년)
- 公山城 百濟推定王宮址 發掘調査報告書(安承周·李南奭, 公州師範大學博物館, 1987년)
- 公山城(安承周, 公州師範大學 百濟文化硏究所, 1982년)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성 [公州 公山城] (고고학사전, 2001. 12., 국립문화재연구소)
1993년에 복원한 금서루
공산성의 성벽
공산성의 성곽길~
공산정
흔적만 남은 배다리와 금강철교가 내려다 보입니다.
장마철 후덥지근한 날씨와 반짝 햇볕을 피해 숲과 바람과 새소리가 청아할 산사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마침 가는 날에 우리의 전통사찰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합니다.
마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本寺)이다. 이곳의 물과 산의 형세는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祕記)에서는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절의 창건 및 사찰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에게서 하사받은 전(田) 200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通度寺)·월정사(月精寺)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자장이 절을 완공한 뒤 낙성식을 할 때 그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무성했다’고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있다. 두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염(無染)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인 마곡보철(麻谷普徹)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 이 절은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약 200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려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하였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에게서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에게서 전답 200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다. 그 뒤 60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대적광전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31본산(本山)시대에는 도내 100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한 이 절은 김구(金九)와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한말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 쓰치다(土田壞亮)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이 절에 숨어서 승려를 가장하며 살았다. 지금도 대광명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다. 현재 이 절은 충청남도 70여 개 말사(末寺)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교(極樂橋)를 사이에 두고 보물 제801호인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과 보물 제800호인 공주 마곡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802호로서 천장의 무늬가 아름다운 공주 마곡사 대광보전(大光寶殿), 강당으로 사용하는 흥성루(興聖樓), 해탈문, 천왕문, 16나한과 2구의 신장을 모신 응진전(應眞殿), 명부전이 있으며, 응진전 맞은편에는 요사채인 심검당(尋劍堂)이 ㄷ자형으로 크게 자리잡고 있다.
또 영산전 옆에는 벽안당(碧眼堂)과 매화당(梅花堂)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염화당(拈花堂)·연화당(蓮華堂)·매화당(梅花堂) 등 승려가 거처하는 요사채가 매우 많다. 이들 건물 중 영산전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 양식을 대표할만한 것이다. 그 현판은 세조가 김시습(金時習)을 만나기 위해서 이 절에 왔다가 만나지 못한 채 돌아가면서 남긴 필적이라 한다.
또 대웅보전은 1651년에 각순이 중수한 것으로, 현판은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특이한 2층 건물로 조선 중기의 사원건축 양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이며, 건물의 기둥을 안고 한바퀴 돌면 6년을 장수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밖의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269-1호로 지정된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과 보물 제270호로 지정된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6, 보물 제799호로 지정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보물 제1260호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괘불탱,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마곡사 동제 은입사향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마곡사 동종 등이 있다.
이 중 오층석탑은 풍마동다보탑(風磨洞多寶塔)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도 하나 라마교 탑과 비슷하여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은 임진왜란 때 무너져 탑 안의 보물들이 도난당한 지 오래이나 1972년에 수리할 때 동제 은입사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되었다. 이 탑은 전 국민의 3일 기근을 막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인도·중국 등 세계에서 3개밖에 없는 귀중한 탑이라고 한다.
이 밖에도 대광보전 마루에는 나무껍질로 만든 30평 정도의 삿자리가 있다. 이 자리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이름 없는 앉은뱅이가 이 절을 찾아와서 부처님께 백일기도를 드렸다. 그는 불구를 고치기 위해서 백일기도하는 동안 틈틈이 이 삿자리를 짰다. 이 삿자리는 참나무를 한 끝에서 잇고 또 이어 한 줄로 완성한 것인데, 그는 이 자리를 짜면서 법당에 봉안된 비로자나불에게 자신의 불구를 낫게 해줄 것을 기도하였다. 백일 뒤 일을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문을 걸어나갔다고 한다.
부속암자로는 심정암(深淨庵)·부용암(芙蓉庵)·북가섭암(北迦葉庵)·토굴암(土窟庵)·백련암(白蓮庵)·영은암(靈隱庵)·대원암(大願庵)·은적암(隱寂庵) 등이 있다. 이 절은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봄 경치가 뛰어나다. 백련암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특히 빼어나며, 북가섭암의 바위 뒤에 있는 천미장군수(天米將軍水)는 뛰어난 약수이다. 또 마곡사 앞 냇가 암벽에는 부여 고란사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공주읍지(公州邑誌)』
- 『문화유적총람』-사찰편-(충청남도, 1990)
- 『명산고찰따라』(이고운·박설산, 우진관광문화사, 1982)
- 『한국의 명산대찰』(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네이버 지식백과] 마곡사 [麻谷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곳에서 해탈은 못해도 더위는 피할수 있겠지요~
마곡사의 건축물들~
오래된 분재와 같은 소나무들~
산사의 고목 아래 그늘에 앉아 들뜬 마음과 몸을 식혀갑니다.
절문을 나서 입구로 돌아나오니 산채정식이 정갈하고 맛난 집이 있습니다. ~태화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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