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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하늘금2002 2010. 12. 13. 14:27

 

문경새재

 주흘관(제1관문) ~ 조곡관(제2관문) ~ 조령관(제3관문)

<2010. 10. 22(수), 맑음>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조령)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의 「새(사이)재」, 새로 된 고개의 「새(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유적>

문경관문(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

종 목  사적  제147호 
면 적 47,283㎡
지 정 일 1966.03.22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555 
시 대 조선시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자 군사적 요새지이다.

이곳은 고려 초부터 조령이라 불리면서 중요한 교통로로 자리잡았다.

 

조선 선조 2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시의 군사와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 것이라 생각했지만 신립장군은 조령에서 왜군을 막지 못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왜병을 맞서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해 조령에 대대적으로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하다가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개의 관문을 완성했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 제2관문을 조동문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을 조령관이라 한다.

 

조동문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후 신충원이 이곳에 성을 쌓은 후부터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숙종 34년(1708)에 조령산성을 쌓을 때 매바위 북쪽에 있던 옛 성을 고쳐 쌓고,

중성을 삼아 관문을 조곡관이라 했다. 현재의 시설은 페허가 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후기> 

문경은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뚫려 이전 보다 도로 교통이 한결 좋아졌다.

요즘 고속도로라 하는 것이.....옛날에도 있었을까?

결론은 있었다....영남대로.....지금의 문경새재

 

영남의 물산.....멀고도 험한 백두대간을 넘어...한양으로 갔던 길

영남의 선비들......부귀와 청운의 꿈을 꾸며....발걸음을 옮겼던 길

지금은 고즈녁한 옛 길이 되어.....옛 성곽만이 자리한....그 곳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충북 충주 수안보를 잇는 옛 길이니.........

청정 계곡을 끼고 새재로 이어지는 숲 길은....

물소리....새소리....수려한 계곡에 역사의 향기와 숨결을 간직한 

아름답고 귀한 곳이라는 생각은 나만의 느낌일까?

 

그 옛날의 명성 만큼은 아니지만........ 소중하게 간직되어....... 걷기에도 좋은 길

좌로...우로....백두대간을 잇는 천연의 요새.....

조령산.... 마패봉....부봉..주흘산...탄항산...포암산이 성곽이 되니

영남의 관문이자 한양의 관문이다.

 

마침 가는 날이 문경 사과축제 기간이라 입구에서 부터 문경스러움을 물씬 느끼며

축제의 요란함과 옛스러움의 향기가 ....절묘히 조화되니...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된다.

조령1관문 입구에서 문경새재의 정상인 3관문 까지 걷는 시간만 왕복 3:30 정도....

새재주막의 16가지 산채를 섞었다는 산채전과 여러가지 약초로 빚은 새재주를 맛보려면 여유 시간을 가져야 겠다.

 

넓은 대로를 걷다 싫증날때 쯤 옛 선비들이 걸었던...........

장원급제 ........길을 따라가 보기도 하고

걷다 힘들면......... 청정계곡에 발담그기가......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그냥 그런 자세로 쉬어 가기도 한다.

 

 

사과축제와 가을 소풍이 겹쳐

인파가 넘치는 새재 기는 길 입구....

 

 

<신길원현감 충렬비>

종 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45호

지 정 일 1981.04.25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340-1 
시 대 조선시대


문경세재 제 1관문 주위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길원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신길원은 선조 때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후에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문경현감이 되었다.

현감을 맡아보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공격해오자, 관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왜적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을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숙종 32년(1706)에 세웠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문경향교 앞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아직 파란 기운이 도는 은행나무 가로수를 지나 

사극 촬영...전쟁터엔

삼과축제가 한창이다. 

영남의 선비들이 이곳을 지나며

금의환양을 꿈꾸었던 과거길이란다. 

 

 

 

 

 

천연의 요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주흘산 조령관문 일원>

종 목  경상북도 기념물  제18호

면 적 4,209,908㎡
지 정 일 1974.12.10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21-1외 615필 
시 대  조선시대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주흘산은 백두대간의 주축에 자리잡은 산으로 주변의 산들과 더불어 험준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영남에서 백두대간의 험한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가는 주요 통로 중 하나인 조령관문(사적 제147호)이 있다.

이 관문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제3관문인 조령관으로 되어있는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어서 숙종 34년(1708)에 조곡관을 다시 만들고, 주흘관에 초곡성과 조령산성을 각각 지었다.

관문 일대에는 관원들의 숙박시설인 조령운의 원터와 신라 문성왕 8년(846)에 세운 혜국사가 있다.

조령천 계곡에는 여궁폭포와 쌍룡폭포가 나무들과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경관을 이루고 있다. 

 

1관문....주흘관 입구 

 

청정계곡은 단풍이 물들어 간다. 

 

 

 

 

 

 

 

 

지금은 옛 관사의 흔적만 남았지만...

 

 

 

삼삼오오....정겨운 나들이 길로 보인다.

 

 

 옛 길 군데군데....옛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도

 

 

 

 

 

계곡의 풍광에 발걸음 멈추며...... 

 

 

 

 

 

 

 

 

 

 

 

조곡관...2관문

 

 

깊어가는 가을 만큼....

계곡의 단풍도 물들어 간다.

 

 

 

 

 

 

 

 

 

 

 

 

그렇게 소원하던 장원급제.....

이 길 걸으면 장원급제 한다던가

새재 정상......조령3관문... 

 

 

 

 

 

 

 

 

 

 

 

 

 

 

 

 

 

 

 

 

 

 

 

 

 

 

 

 

 

 

 

<조령 산불됴심 표석>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26호

지 정 일 1990.08.07
소 재 지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산42-50 
시 대  조선시대


산불조심의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 세운 비로,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다.

서쪽면에 ‘산불됴심’이라는 순 한글 글자를 세로로 큼지막하게 새겨 놓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경수호와 산성 등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고

산불을 조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이를 서민들이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비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 한글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이 표석은 ‘조심’을 ‘됴심 ’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조선 영·정조 시대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그 길을 다시 걸어 나오니

사과축제를 더욱 빛내는.....사과의 성....자연 사과로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