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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그 후...... 본문
태안! 그 후.....
만리포해수욕장/천리포수목원/꽃지해수욕장/시인 천상병 고택/해미읍성
<2008. 7. 4(금) ~ 7. 5(토), 흐리고 가끔 비>
안면도................
면적 87.96㎢, 인구 1만 2536명(2006)이다.
우리 나라에서 여섯번째로 큰 섬으로, 태안반도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면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고랍국, 고려시대에는 안면소·광지향, 조선시대에는 안상면·안하면이라 하였으며,
임진왜란 뒤에 안면소·안면곶이라고 하였다.
1895년에는 태안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상면·안하면이 안면면에 병합되어 서산군에 속하였다.
1980년 안면면이 안면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9년 서산군에서 태안군이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안면읍은 본래 곶으로서 육지인 남면과 연륙되어 있었는데,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조선 인조 때 지금의 안면읍 창기리와 남면의 신온리 사이를 절단함으로써 섬이 되었다.
현재는 연륙교로 육지와 이어져 있다.
북쪽에 솟은 국사봉(107m)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드나듦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진다.
1월 평균기온은 -2.7℃, 8월 평균기온은 25.6℃, 연강수량은 1,155㎜이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주민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농산물로 쌀·보리·콩·고구마·고추·마늘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고추와 마늘은
생산량이 많아 상인들과의 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연근해에서는 남방붕장어·우럭·낙지 등이 잡히며, 김·굴·새우류·바지락·백합 등의 양식과 천일제염이 이루어진다.
유적으로 신야리에 조개무지, 고남리에 고인돌(지석묘)이 있으며,
승언리에 안면도의 모감주나무군락(천연기념물 138)이 있다.
단일 소나무숲으로는 세계 최대인 자연휴양림과 영목항·황도포구 등의 볼거리가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으며,
안면읍사무소와 고남면사무소를 비롯한 우체국·파출소·농업협동조합·보건지소 등이 있다.
만리포 해수욕장..........
충남 태안군 소원면 모항리에 있다.
백사장 길이 2.5 km. 너비 100 m. 면적 20만 m2. 서산 시청에서 28 km, 홍성읍에서 40 km,
태안해안국립공원의 명소로 태안반도(泰安半島) 서쪽 끝에 있는 천리포해수욕장과 남북으로 이웃한다.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는 넓은 사장이 드러난다.
교통이 편리하며 호텔 등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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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포수목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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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이며 초대 원장인 민병갈(미국명 Carl Ferris Miller, 1979년 귀화, 2002년 4월 8일 사망) 개인의 기금 출연으로 운영되었다. 1962년 구입한 6,000평의 토지를 기반으로 1970년부터 연차적으로 부지를 확장해가면서 기후가 비슷한 외국과 국내 여러 곳으로부터 현지 기후와 토양에 적응할 수 있는 식물들을 지속적으로 수집해 체계적으로 관리해왔다. 약 18만 평(60ha)의 부지에 크게 7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토질·기후, 기존 식물상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따라 종류별로 적절히 배치·관리한다. 《보유식물목록》을 발행하기도 했다. 중점 수종은 목련 약 400 종, 호랑가시나무류 370종, 무궁화 250여 종을 비롯해 침엽수 종류와 매자나무속, 진달래속, 참나무속, 단풍나무속, 분꽃나무속, 녹나무과 등이다. 그외에 조록나무과, 자작나무과, 서향나무속, 장미과, 차나무과 식물 등 다양하다. 1978년부터는 국제적인 식물연구 교류사업인 인덱스 세미넘(Index Seminum)에도 참가해 현재 33개국 315여 개의 저명한 식물원·수목원·자연사박물관 등과 교류하고 있다. 입장시간은 하절기(4월~9월)에는 오후 5시까지, 동절기(10월~3월)에는 오후 4시까지이다. 추석, 설연휴를 제외하고는 연중무휴로 운영된다. |
천리포 수목에서 보이는.......
천리포 해수욕장
꽃지 해수욕장.............
백사장 면적은 96㏊, 길이는 3.2㎞, 폭은 300m, 경사는 3도, 안정수면거리는 300m로,
승언리에서 서남쪽으로 약 4km쯤 떨어져 있는, 안면도에서 제일 큰 해수욕장이다.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수심, 맑고 깨끗한 바닷물, 알맞은 수온과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이루어져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피서객들로 붐빈다.
1989년에 해수욕장으로 개장하였다.
물이 빠지면 갯바위가 드러나 조개·고둥·게·말미잘 등을 잡을 수 있다.
오른편에는 전국에서 낙조로 가장 유명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가 있어서 연중 사진작가들이 찾고 있다.
주변에 방포포구와 자연방파제인 내파수도·외파수도, 안면도 자연휴양림 등 관광명소가 있다.
2002년 안면도 국제꽃박람회가 이곳과 자연휴양림 일원에서 개최되었다.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꽃지해수욕장에 있는 바위이다.
면적은 약 10,526㎡이다. 안면도 자연휴양림에서 약 2㎞ 되는 지점에 있으며, 바닷물이 빠지는 시간에는 직접 걸어서 가 볼 수 있다.
바위 사이로 해가 떨어지는 아름다운 일몰 광경은 변산의 채석강, 강화의 석모도와 함께 '서해의 3대 낙조'로 손꼽힌다.
이 바위는 통일신라시대 때 있었던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9세기 중엽 장보고가 청해진에 주둔해 있을 때, 당시 최전방이었던 안면도에 승언이란 장군을 지휘관으로 파견하였다.
장군의 부인은 빼어난 미인이었고 부부 사이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의 금슬을 부러워하며 시기하자, 장군은 바다 위에 있는 2개의 바위섬에 집을 짓고 부인과 떨어져 살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장군이 먼 곳으로 원정을 나가 돌아오지 않자 그를 그리워하며 기다리던 부인은 바위가 되었다.
이후 부인 바위 옆에 또다시 바위가 생겨났고 세상 사람들이 두 바위를 '할미 할아비 바위'라고 불렀다.
가까이에 소나무가 아름다운 안면도 자연휴양림, 신선한 수산물을 접할 수 있는 방포항 등이 있다.
경관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전하는 전설이 있어 민속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9년 12월 9일 명승 제69호로 지정되었다.
시인 천상병 고택..................
시인 겸 평론가.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렸으며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주요 작품으로 《새》, 《귀천(歸天)》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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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효고현(兵庫縣) 히메지시(嬉路市)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4년 중퇴. 1949년 마산중학 5학년 때, 《죽순(竹筍)》 11집에 시 《공상(空想)》 외 1편을 추천받았고, 1952년 《문예(文藝)》에 《강물》, 《갈매기》 등을 추천받은 후 여러 문예지에 시와 평론 등을 발표했다. 가난·무직·방탕·주벽 등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는 우주의 근원, 죽음과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 등을 간결하게 압축한 시를 썼다. 1971년 가을 문우들이 주선해서 내준 제1시집 《새》는 그가 소식도 없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었을 때, 그의 생사를 몰라 유고시집으로 발간되었다.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 또는 ‘문단의 마지막 기인(奇人)’으로 불리던 그는 지병인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주막에서》,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등의 시집과 산문집 《괜찮다 다 괜찮다》, 그림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 등이 있다. 미망인 목순옥(睦順玉)이 1993년 8월 《날개 없는 새 짝이 되어》라는 글모음집을 펴내면서 유고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를 함께 펴냈다. |
안면도 끝자락.................구애항
해미읍성...............
종 목 | 사적 제11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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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해미읍성(海美邑城) |
분 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
수량/면적 | 194,102.24㎡ |
지정(등록)일 | 1963.01.21 |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국유,사유 |
관리자(관리단체) | 서산시 |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