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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금강~2008 여름

하늘금2002 2008. 7. 10. 16:49

 

 

내금강 ~ 2008 여름

<2008. 7. 7(월)~7. 9(수), 습기많고 후덥지근 불볕 더위에 찌증나는 날들>

 

1일차 : 남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 ~ 금강문 ~ 휴전선 ~ 북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 ~ 온정각 ~ 교예공연 관람

2일차 : 내금강<온정각 ~ 온정령(106구비) ~ 표훈사 ~만폭동 ~ 묘길상 ~ 마하연터

          ~ 보덕암~ 서산대사 부도 ~ 삼불상 ~ 장안사터 ~온정령 ~ 온정각>

3일차 : 해금강 ~ 삼일포 ~ 온정각 ~ 귀환

 

 

내금강 관광길이 열리고 금강산에서 모임을 갖게되어 작년에 이어 금강산으로 향한다.

아침 9시경 출발 12시경 속초에서 점심을 먹고 고성 남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서 방북 수속을 마친 후 곧 동해안 도로를 따라가다

강건하고 씩씩한 대한민국 군인이 초병을 서고있는 남측 DMZ초소인 금강문을 14시경? 통과한다.

 

DMZ은 조용하고 평화롭게만 보이는데

이곳이 동.서독에 이어 유일하게 남은 동서냉전의 현장으로 언제 총성과 포화가 난무하는 격전장이 될지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멈추니 .... 등골이 오싹..... 우리 민족의 운명이 왜 이토록 가혹한가?

쓰러져가는 낡은 시멘트 말뚝이 휴전선이라 한다.

곧 남측과 대비되는 낡고 허름한 북측 초소를 통과하여 사위에 초병들 눈초리가 번득이는 북측 출입국 관리 사무소를 지난다.

두번째 가는 때문인지 긴장감이 다소 덜하지만 여전히 차창의 풍경 사람사는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금강산의 11999번째봉이라는 구선봉을 지나 온정각으로 향한다.

들판은 농사 일로 멀리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들판에 소가 풀을 뜯고있는 우리네와 전혀 다르지 않은 익숙한 농촌 풍경이다.

남쪽에서 발원한다는 남강을 지나 금강산 통로에 있는 마을을 통째로 옮겼다는 곳, 김일성 영생탑,

남북 협력사업으로 진행하는 비닐하우스, 밤나무단지를 차례로 지나고

곧 이산가족 상봉센터 그 옆에 스키장이 보인다.

 

북측 예술단원들의 교예공연을 관람하고 이전 폐허 같던 김정숙 여관을 개수한 외금각 호텔에 여장을 푼다.

자정무렵 산책길에 김정숙 벽화가 있는 곳에 8~9명의 사람이 극 연습을 하는 것 같아 들렸더니

북측 관광관련 근무자들이 벽화 주변에 나방 등 곤충들이 몰려드는 것을  �으려

에프킬라를 뿌리며 빗자루로 쓸고 �으며...... 달 밤에 무엇을 하는건지.... 씁쓸한 현장을 목격한다.

 

교예공연은 체조, 기예, 음악을 혼합한 공연으로 보이는데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 무어라 평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볼만하다.

공연이 없을시는 학생, 회사 등 단체 관광객들이 임대하여 사용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온정각 일원은 현대아산에서 60년 동안 임대한 곳이다.

 

둘째날, 아침 일찍 온정강을 출발하여 외금강 106구비를 돌아 온정령을 넘는다.

외금강과 내금강의 경계를 긋는 해발 870여 미터의 온정령을 넘으며 ... 이곳이 백두대간의 마루금인가?

하는 생각에 미치니 우리 산줄기를 따라 걸었던 추억으로 금방이라도 버스에서 내려 길따라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온정령을 넘나드는 외금강과 내금강을 잇는 도로는 일제때 10년간 공사를 해도 길을 내지 못했다는데

6.25때인 1951년의 겨울 엄동설한에 단 두 달만에 그 어려운 길을 냈다하며 그 들만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래서 땅굴파는 실력으로 이어진건가?

 

정상부는 터널로 이어지며 고성군에서 금강군으로 행정구역이 바뀌며 비포장도로가 표훈사까지 계속된다.

마침 가는 날이 김일성 서거 14주년이 되는 날이라하여 김일성 영생탑, 초상화가 그려진 벽 탑 등에는

꽃다발이 겹겹 줄줄이 놓여 있고, 깔끔하게 차려 입은 주민 행렬이 길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다.

길가에 위치한 똑 같은 모양의 주택 단지, 2~4층의 주택들도 보이고

냇가에 멱 감는 아이들, 나무 밑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정답게 노는 아이들 모습도 보인다.

해발 600미터 내외 고원지대로 남측의 평창 구릉지대를 연상케 한다.

 

표훈사 경내를 둘러보고 우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묘길상으로 향한다.

등산로는 일반 관광객들이 갈 수 있도록 잘 닦여있다.

양사언의 "만폭동" 글.....그리 절경은 아닌 것 같은 .... 만폭동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가 묘길상까지 이어진다.

묘길상은 암벽에 대형 부처 암각상이 자리하고 작은 불탑이 놓여있는 옛 암자터 인것 같다.

내려오는 길에 지금의 승가대학과 같은 지금은 그 너른 터와 주춧돌만으로 예전 그 규모를 짐작케하는

마하연 터를 보고 보덕암으로 향한다.

보덕암은 절벽 위에 굵은 철봉을 기둥으로 받히고 지은 암자로서 볼만한 거리였다.

 

만폭동 계곡을 따라 내려 표훈사 앞 천막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부도 ~ 삼불상 ~ 울소 ~ 장안사 터를 잇는 산책로를 따라가며

관광해설원 명찰을 단 북측 안내원들이 이래저래 말을 붙여 대화를 하게된다.

이틀동안 그들의 대화 주제는 북미협상 및 핵문제, 일본의 6자회담 참여와 북측의 일본인 납치사건, 촛불시위와 소고기파동, 국회등원,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등 보통사람으로서는 쉬이 접하고 토론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제들을 화제로 올리며 의견을 묻는다.

 

은근히 남측의 혼란을 부추기는 듯한 뉘앙스와 남한 사정에 매우 밝다는 느낌를 받는다.

바빠서 다른 곳으로 가겠다 하면 담배 한 대 태우며 또 같이 가자한다.

작년과 다른 적극적인 그들의 모습을 보며 모든 안내원들이 똑 같은 주제로 천편 일율적인 말을 반복한다는 느낌을 갖는다.

 

남측의 쇠고기 파동과 촛불시위는 이미 끝난 문제로 인식한다.

노동자인 나는 사실 수입 쇠고기의 혜택을 받는다.

AI와 쇠고기 파동 때문에 대체재인 돼지고기 값이 엄청올라 고기 먹기가 힘들었는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어 돼지고기 값이 많이 내려 고기를 싼 값에 먹을 수 있게됐다.

국회의원은 국회 일하라고 선출했기에 국민의 무언의 압력을 받아 곧 18대 국회는 개원할것이다.

 

한미 FTA는 수출로 먹고사는 남측으로서는 주요 교역국인 미국과의 협정 체결은 꼭 필요하다.

남한은 전 세계에 수출하는 반도체, 조선, 건설, 가전, 자동차 등 세계 최고의 제품이 많다.

기름 값이 올라도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여 싼 값에 전기를 생산하고 원전 건설 기술을 중국 등에 수출한다.

등등....... 원전을 북측에도 건설해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잘되면 그리될것이다.

일개 관광객이 남측 정부를 대신해 북한 당국자와 회담을 해야할 정도의 내용이 되는 것 같다.

 

대화중 북측 안내원이 태백산맥이란 말을 한다.

우리 산줄기를 걸어온 경험을 토대로 태백산맥은 없다.

일본제국이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백두대간~정간~정맥의 우리 산줄기 체계를 말살하였다.

우리 산줄기 체계의 원리는 산은 물은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않는다는 산자분수령이며

산과 물이 다르지 않고 산줄기가 강의 유역을 만드는 경계이며 강을 보면 산줄기가 보인다.

백두대간이 이땅의 기후, 지역의 언어와 문화, 풍습, 사는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다는 설명을 해줬더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관광지에 막걸리, 음료, 꼬치 등 먹거리 포장마차가 들어서고 이전보다 더 적극적 영업을 한다.

기념품을 파는 행상들이 관광버스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다니며 좌판을 폈다 덮었다를 반복한다.

3년제 평양 관광대학을 졸업하고 식당 접대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북측 젊은 여성의 말을 빌리면

조선노동당은 2012년까지 강성대국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한다.

참고로 관광 근무자의 70% 정도가 평양에서 온 엘리트들이고 30% 정도는 현지인 들이라 한다.

 

해금강은 남측 고성(간성?)부터 북측 고성까지 동해안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절경이라 하는데

그들이 개방한 곳은 이중 철책 민통선 안에 일부 해안지역이다.

남측 어디든 가도 볼 수 있는 정도의 바위가 좀 많은 해변 풍경이라 기대에 비해 실망이 크다.

해안 절벽 위에 포대가 있어 그 곳은 촬영 금지라 한다.

삼일포 호변을 따라 이어지는 코스는 아름다웠다. 

 

 

 

기암 절벽에 자리한 보덕암

 

 

 남측 출입 관리 사무소를 나와 북측으로 넘어가는 버스를 향한다.

 

 

 사진 촬영을 금한 DMZ과 북측 지역을 지나 온정각에 도착 ... 교예단 공연장

 온정각의 면세점

 김정숙 여관을 개수한 외금강호텔

 온정각 주차장... 뒤쪽으로 암봉들

 

 교예단 관람권

 공연을 마친 후 교예단원들 

 밤하늘의 달빛이 곱다.

 짧은 밤이 지나고... 내금강 출발 준비를 하며...금강산 줄기들

 

평양에 있는 옥류관의.........

2/3 규모라 한다.

 

 

 

 

 

 

온정령...............

외금강 온정일에서 만물상쪽으로 올라가는 고개가 온정령이다.

이 고개는 너무 가파르고 꼬불꼬불해서, 앞에 올라가는 사람의 발 뒤꿈치가 뒷 사람의 이마를 칠 정도이다.
온정령은 강원도 고성군과 금강군, 외금강과 내금강을 잇는 중요한 고개이다.

지나가면서 문주담, 육화암, 만물상 등 절경을 만날 수 있다.

외금강의 만상정을 지나 절경을 이루는 오른쪽의 만물상을 바라보면서 서북 방향으로 2㎞쯤 더 오르면 온정령을 만나게 된다.

온정령(857m)은 고성군과 금강군, 외금강과 내금강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사철 아름다운 온정령 길의 풍경은 고개를 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자주 멈추게 한다.

온정동에서 고개 마루까지 106굽이나 되는 고개 길은 가파르지만 오를수록 전망이 트이며

6.25사변때 겨울철에 터널을 뚫었다 하며 지금은 터널로 차량이 통행하고 있다.

온정령의 동서쪽은 금강산의 식물상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여,

봄, 여름, 가을 할 것 없이 꽃과 단풍이 만발하여 하나의 식물원과 같은 느낌을 주는 명승지이다.

외금강 온정각을 출발 106구비를 돌아 온정령을 넘고

60~70년대 남측의 신작로를 연상케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표훈사에 도착한다.

북측 민가와 그 곳 사람들, 조문행렬 등 길가의 풍경을 담을 수 없었다.

 

 

표훈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1만 2천 봉에 머무르고 있다는 보살들의 우두머리 법기보살을 주존으로 모신 사찰로,

670년(신라 문무왕 10)에 신라의 승려 능인·신림·표훈이 처음 세우고 신림사라 하였다가 3년 후 표훈사로 이름을 고쳤다.

 

내금강 만폭동, 내금강 어귀에서 골짜기를 따라 약 4km 거리에 있으며,

금강산 4대 사찰(유점사, 장안사, 신계사, 표훈사)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불에 타버리거나 쇠락한 것을 1682년(숙종 8)과 1778년(정조 2)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하였다.

원래 20여 동의 많은 전각이 있었지만 현재 경내에는

반야보전(殿), 명부전, 영산전, 어실각(), 칠성각, 능파루() 등의 전각과 7층석탑이 남아 있다.

표훈사의
가람배치는 마당의 7층석탑을 가운데에 두고 

동·서·남·북에 건물이 담을 에워싸듯 배치되어 있는 사동중정형()의 산지가람형이다.

7층석탑을 중심으로 본전인 반야보전과 입구인 능파루가 남북의 중심축을 따라 마주 보고,

반야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과 영산전이 양쪽에 나란하게 있으며, 

석탑을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 극락전터와 명월당터가 있다.

또 능파루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에는 요사채인 판도방()과 어실각이 있다.

반야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집으로 가구는 7량집의 규모이다.

네 모서리기둥과 어칸 양쪽 기둥 상부에 용두형 안초공을 짰는데, 외부로는 용의 머리를 내고 안으로는 몸통을 조립했다.

귀기둥 상부에는 낙양을 조각하여 매달았다.

내부는 천장 복판에 현란한 단청을 장식한 반자로 꾸미고 섬세하게 조각한 닫집을 설치했다.

불단에는 법기보살의 장륙상()을 봉안하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정면이 아니라 동쪽 법기봉을 향해 있다.

불당 이름이 반야보전인 것은 주존인 법기보살이 늘 반야()를 설법하기 때문에 지어졌다고 한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영산전은 장대석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형식으로 5량구조의 맞배지붕집이다.

전체적인 단청은 금모로단청으로 치장하였다. 능파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누각건물이다.
이밖에도 중심영역의 북동쪽에 칠성각이 있고 서남쪽에 어실각이 있다.

어실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다포계 형식의 맞배지붕집이다.

일반적인 사당건축 형식으로 지어졌으나, 단청이 화려하다.

1796년(조선 정조 20) 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쪽의 법기봉을 비롯한 금강산의 주봉들이 사방을 둘러 일대 경관을 이루고 있는 깊은 산골짜기의 반듯한 절터에 있는 사찰이다.

반야보전을 비롯한 건물들의 조성기법이 조선시대 사찰건축의 절정을 보여주며,

단청이 화려한 조선 후기의 건축술을 대표한다. 


 

표훈사 전경들

 

 

 

 

 

 

 

 

 

 금강문이라 하는데.... 이런 곳은 남측에도 수없이 많죠.

 

 곳곳에 이런 흔적들이

 

 

만폭동계곡을 따라가며 

 

만폭동............. 

1985년 7월 북한 천연기념물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내강리에서 북쪽으로 4.6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금강문으로부터 화룡담까지의 1.2km 구간을 포괄한다.

중생대 쥐라기에 관입된 화강암이 신생대의 단층운동 후 오랜 기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되었다.

금강산 중에서도 계곡의 절경을 대표하는 구역으로 수많은 폭포들과 소()들이 있다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는
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거북소·배소·화룡담 등 내금강팔담()과

진주폭포·분설폭포·관음폭포 등 수많은 폭포들이 있다.

금강문·금강대·충성대·만상암·법기암·장경암·수건바위·지도바위·사자바위 등의 기암괴석도 있다.

만폭동의 폭포들은 각기 독특한 모양과 전설들을 가지고 있다.

특히 봄과 가을엔 꽃과 단풍이 어울려 더욱 아름다운 경치를 이룬다.

또 이곳에는 한국 특산식물인 금강인가목(금강국수나무)과 금강초롱꽃이 많이 자라며,

문화재인 보덕암이 있다. 

 

 

양사언 선생의 친필이라 하는데 "만폭동" 보이는가요?

 

 

 개구리

 

 

 

 

 

 

 

 

 

 

 계곡사이로 드러나는 암릉

 

 마하연 터 입구의 부도

 이렇게 잘 정비된 길들이 등산로가 아닌 산책로라고 함이 옳을 듯~~

 

 

 

 

묘길상.....................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다.

내강리 만폭동 골짜기의 묘길상암터 앞 높이 40m의 웅장한 절벽에 새겨져 있는 아미타여래좌상으로, 마하연묘길상이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에 묘길상암을 중창한 나옹()이 직접 새겼다고 전한다.

불상 높이 15m, 너비 9.4m이며 얼굴 높이는 3.1m, 너비 2.6m이다.

손가락 하나가 보통사람의 몸체보다 굵고, 두 다리의 높이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는다.

마애불 옆 바위에 조선시대의 문신 윤사국()이 쓴 '묘길상'이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은 위로 쳐들어 시무외인(),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여원인()을 취하였다.

웃는 얼굴, 긴 눈썹, 가늘게 뜬 실눈, 이마의 백호()와 길게 늘어진 큰 귀, 통통한 볼, 앞가슴을 드러내고

두 어깨에 걸친 옷의 주름 등 조각의 기법이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와 비슷하다.

 

벼랑에 새긴 다른 불상들보다 크기가 훨씬 크지만 앉은 모습의 높이와 넓이 비례가 안정적이다.
얼굴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반면 아래의 옷 부분은 굵고 굳세며 야외광선을 이용하여 시각적 효과를 잘 나타냈다.

마애불 앞에는 높이 3.66m의 묘길상암석등이 남아 있다.

 

묘길상의 암각 불상

 

 

 

 

 

 다시 만폭동 계곡을 따라 표훈사로 향하며

 

 

 

마하연...............

마하연 절터에 대한 설명은 아래의 안내표지판로 대신하고......마하연에 대한 의미를..............

대승교(大乘敎)를 가리키는 말로, 이타(利他) 구제의 입장에서 널리 인간 자체의 평등과 성불을 이상으로 삼고,

그것이 불타의 가르침의 참다운 대도(大道)임을 주장하는 교파.

 

당나라 헌종이 사리를 예법으로 대하니 경사스러운 구름이 나타났고, 송나라 철종이 난야를 수리하니 단 이슬이 내렸습니다.

옛날 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교해 보면 그 법도는 하나입니다. 

화엄론에 이르기를, “화장 20겹 세계의 그 첫째 번에 금강륜의 산이 있는데, 조화가 여기에 모여서 빼어났으며,

파려 구름과 파려 달이 아승지의 누각을 장식하고, 유리 물과 유리 가지가 마하연의 언덕을 둘러싸고 있다.” 하였습니다.

 

대개 담무갈 대사에게 준 금강의 땅으로, 일다 사이에 섭입하여 원만하고 융통스러움이 펼쳐질 것인데,

이에 수리와 조영을 더하여서 더욱 빛나는 장식을 보태었으니,

이것은 모든 부귀와 영화, 그리고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 唐之憲宗禮舍利 而慶雲見 宋之哲宗修蘭若 而甘露降 以古視今 其揆一也 華嚴論云 華藏二十重世界 其第一有金剛輪之山 造化鍾秀于此 玻瓈雲玻瓈月 賁阿僧祗之樓 璃瑠水瑠璃枝 絖摩訶衍之岸 蓋輿曇無竭大士之金剛地 一多涉入 行布圓融者也 玆加修營 益增光飾 此獲雜華富貴 安國利民之善 果必矣 [성종실록 권제7, 13장 앞쪽, 성종 원년 8월 25일(경오)]


 

 

 

 

 

 

 

 

 

 

 

 

 

 

 

 

 

 

 

 

 절 터의 규모를 짐작케하는 기단

 주춧돌

 

 

 물 반 올챙이 반

 

 

 

 

보덕암........................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금강산 만폭동 골짜기에 자리잡은 암자로, 고구려 안원왕() 때에 보덕화상이 창건했다.

지금의 건물은 1675년(조선 숙종 1)에 다시 짓고, 1808년(순조 8)에 중수하였다.

보덕암내금강의 유명한 만폭8담(흑룡담·비파담·벽파담·분설담·진주담·거북소·배소·화룡담) 중에 하나인

분설담의 오른쪽 20m 벼랑에 매달리듯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원래 2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너비 1.6m, 높이 2m, 깊이 5.3m의 자연굴인 보덕굴 앞을 막아 절벽에 지은 본전이고

다른 하나는 굴 위에 지었던 요사채 판도방이다.

본전은 정면 1칸(3.35m), 측면 1칸(0.86m)의 단칸 익공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벼랑 중간에 높이 7.3m의 구리기둥 하나로 마루귀틀을 받쳐 세웠다.

단층 건물이지만 층층이 기둥과 보를 짜올려 3층처럼 보인다.

구리기둥은 1511년(조선 중종 6)에 설치한 것으로, 나무기둥에 19마디의 동판을 감은 것이다.

벼랑 위 평지에 정면 3칸(6.49m), 측면 1칸(3.47m)의 판도방과 돌탑이 있었으나 지금은 보덕굴로 내려가는 층대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보덕굴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마음씨 착한 보덕각시가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보덕굴 절벽 아래 만폭동 계곡의 바위에는 보덕각시가 머리를 감았다는 세두분이라는 지름 40㎝, 깊이 40㎝의 동그란 샘구멍이 있고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보덕각시가 세수를 하고 수건을 걸었다는 수건바위가 있다.

동굴을 이용한 전실 시설을 여러 가지 형태의 지붕으로 층층이 조화롭게 세운 기교있는 건축이다.

내금강의 오현봉, 청학봉, 향로봉 등을 배경으로 구리 기둥 하나에 의지하여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기묘한 사찰이다. 


 

기암절벽에 위치한 보덕암의 여러 모습들 ~~ 예전 교과서에서 본 듯한 모습이다.

 

 

 

 

 

 

 

 보덕암 지붕

 

 

 

 

 

 자라바위

 

 

 

 금강문의 뒷 모습

 다시 표훈사로 내려와

 

 

 

 

 

 

 

 

 

 

표훈사 앞 숲속의 천막식당 

서산대사님의 부도가 있는 곳

 

 

서산대사님 부도

 

 

 

 삼불상으로 이어지는 산책로

 

 

삼불상..................지식백과에 없다..........

 

삼불상의 뒷면

 

 

바위 앞면의 삼불상

 

 

 다시 계곡을 따라 장안사 터로 향한다.

아비의 죽음을 슬퍼하며 납작 엎드린 삼형제 바위라 한다.

 울소~~ 삼형제가 슬피우는 듯한 소리가 난다는 소

 천마상을 조각한 바위~~ 자연훼손 맞죠?

 

장안사.........................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안사금강산의 4대 사찰의 하나로 내금강 만폭동의 유명한 명승지였으며,

내강리 금강산 장경봉 아래 비홍교(만천다리) 건너편에 그 터가 자리잡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또는 556년(고구려 양원왕 11) 고구려의 승려 혜량이 신라에 귀화하면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773년(
신라 혜공왕 8) 율사 진표()가 중수하였고,

970년(고려 광종 21) 불타 없어진 것을 982년(고려 성종 1) 회정()이 중건하였다.

1343년(충혜왕 4) 원나라 순제()의 왕후인 고구려인 기씨()가 돈과 공인들을 보내와 무너진 건물을 중건하고 새 누각을 지었다.

1458년(세조 3) 세조가
대웅전을 중수하도록 명하고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1477년(조선 성종 8) 소실되어 일청()이 중건하였다.

1537년(중종 31) 다시 불타 1545년(인종 1) 일청이 또 중건하고,

1728년(영조 4)과 1791년(정조 15) 중창·중건된 뒤 1842년 부원군() 조만영()의 보시로 300여 칸의 대찰로 증축되었는데,

1863년 호조판서 김병기()가 주상하여 공명첩() 500장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1,200냥을 보시하여 중수하였다.

가람배치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과 사성전을 중심으로 한 구역의 두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각 중심법당은 중층 구조로 되어 있고 각 영역 입구에 누각 건물 하나씩 갖추고 있었다.

6전(殿)·7각()·2루()·2문() 외에 10여 채의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6·25전쟁 때 불에 타버리고 축대·비석 등만 남아 있다. 

 

장안사 터의 양산을 받쳐든 북측 안내원

 

또 다시 비포장도로를 2시간여를 달려 온정각에 도착하여

 김정숙 벽화가 있는 외금강호텔 광장~~ 자정무렵 8명의 여성들이 에프킬라를 뿌리며

나방과 곤충을 �고 쓸어내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청소하는 모습이...엉뚱한 곳에 지극정성

 금강산의 일몰

 

 

 셋쨋날, 온정각에서 해금강~삼일포 관광을 출발한다.

 정몽헌을 추모한 도올의 문구가 적힌 비석

 희미한 금강산의 암릉 줄기

 

 

해금강.......................

외금강 동쪽 동해안에 있으며, 해금강이란 이름은 경치가 금강산을 닮았다고 하여 남택하()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삼일포와 남강 하류에서 북쪽으로는 금란굴·총석정 일대와 남쪽으로는 영랑호·감호·화진포에 이르는 약 30㎞ 구간이다.

 

삼일포·해금강·총석정 구역이 있는데, 그중 삼일포·해금강·총석정을 도는 총석정 코스가 알려져 있다.

화강암이 해안에서 반석·언덕·암초 등을 이루어 절경을 이루며,

총석정·현종암·선암·불암·송도·사암·칠성암·해만물상() 및 입석리() 해안과 영랑호() 등의 경승이 알려져 있다.

 

총석정은 주상절리가 발달한 기반암이 바닷물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삼일포는 사주에 의해 둘레 8㎞, 깊이 9~13m, 넓이 790㎡로 형성된 석호로 예로부터 관동팔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해만물상은 맑은 물 밑과 물 위로 외금강의 만물상을 바다로 옮겨 온 것 같이 수중 만물상이 펼쳐져 있다.

 

삼일포 전경..... 코끼리 비스켓 모양..... 아름다움이 실감 나지않는 해금강

 

 

 

 

 

 

이곳보다 더 먼쪽에 해안포 진지가 있으니

그 곳은 촬영금지라 한다.

 

 

 

 

 

 

 

 

 

 

 

 

 

 

 

 

 

 삼일포로 이동....... 북측 관광안내원인지~~ 선전대원인지

천편일율 같은 화제를 반복한다.

 여기도 같은 모습

이렇듯  포장마차도 들어서고..더욱 적극적 영업을 한다.

 삼일포 전경들~~

 

 

 

 

 

 

 

 

 

 

 

 

짜식...니 불륜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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