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금
가야 흔적을 찾아 본문
가야 흔적을 찾아
구지봉/파사석탑/허왕후/김수로왕릉
<2011. 1. 22(토)>
지인의 혼례에 가는 길에 .............
한반도 남단....낙동강 하구에서 고대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왕국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고대왕국 가야의 흔적을 찾아 김해와 그 주변을 돌아본다.
가야.................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문인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뿐이다.
이 기록은 내용이 워낙 소략하기 때문에 가야사를 복원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본서기》에도 가야의 역사가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일본인들이 많이 왜곡하였으므로 사료비판이 요구된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야는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변한(弁韓) 12국에서 발전하였는데,
여기에는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접도국(接塗國)·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고순시국(古淳是國)·반로국(半路國)·악노국(樂奴國)·군미국(軍彌國)·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감로국(甘路國)·구야국(狗邪國)·주조마국(走漕馬國)·안야국(安邪國)·독로국(瀆盧國)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자미동국은 고성, 미오야마국은 고령, 구야국은 김해, 안야국은 함안에 위치하였음이 확인되고,
나머지는 그 위치에 대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삼국지》가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한 것이므로 이 시기까지 가야란 명칭은 쓰이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阿羅伽耶:함안)·고령가야(高寧伽耶:함창)·대가야(大伽耶:고령)·성산가야(星山伽耶:성주)·소가야(小伽耶:고성)·금관가야(金官伽耶:김해)·비화가야(非火伽耶:창녕) 등의 명칭이 나오며,
《일본서기》에도 다른 기록에 보이지 않는 탁순(卓淳)·탁기탄(喙己呑) 등이 나온다.
특히 《삼국유사》 기록은 대략 3세기 중반 이후에 변한지역의 12개국 가운데
일부 국가들이 가야연맹체를 형성하면서 가야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반영한 것이다.
김해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
구지목........거북의 목........
현지 식당 아주머니 왈...........도로로 끊긴 구지목을 연결됨으로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는....... 설화를 전한다.
가야의 초대 왕 수로왕의 부인으로 허황후또는 보주태후라고도 한다.
본래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야)의 공주로, 48년에 오빠 장유화상 및 수행원들과 배를 타고 가야에 와서 왕비가 되었다.
거등왕을 비롯해 아들 10명을 낳았다.
그녀의 나이(156살)은 수로왕과 9살 연상의 나이차로, 수로왕의 나이(157살)와 함께 논란이 되고 있으나,
이는 가야사람들이 자신의 시조에 신화적인 요소를 포함하고자 과장된 표현이 있던 것으로 사료되고 있다.
파사석탑...........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東漢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음.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본탑은 허왕후께서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것이니
허왕후 곁에 두어야 한다며 옮겼음.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이 시집을 오면서 불교를 전래하고 형제인 허보옥 즉,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와서 대국승으로 활약하였다고 함.
탑은 네모진 사면의 오층이고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조금 붉은 빛의 옥문무늬가 있고 질도 달라 우리나라의 類가아님.
닭 벼슬피에 가루로 만든 파사석과 일반석으로 실험한 결과
파사석 부분은 물기가 계속 남아 있는 반면 일반석은 건조하여 말라버렸다고 함.
거북의 등짝.....산성이 있다.
구지목에서 보이는 김해시가지
구지봉..................
아도간, 유천간 등 9간과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지봉에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춤을 추며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로 고대 국문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정상부에는 B.C 4세기경 남방식 지석묘가 있어 그 역사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지석묘 상석에는 '구지봉석(龜旨峯石)'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구지봉은 이처럼 가야 건국설화와 관련되는 유적으로 우리나라 고대국가 형성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곳이다.
구지봉..............
구지봉 지석묘..........<구지봉석>이라 새겨진 글씨는
한석봉의 서체라 한다.
예전 길거리에 설치되었던 우편함............김해 도로변 주택가에 남아 있다.
김수로왕릉 정면.....김해시가지
김수로왕...............
수릉(首陵)이라고도 하며 김해김씨의 시조이다.
42년(신라 유리왕 19) 금관가야 9부족의 추장인 9간(干)이 김해구지봉(龜旨峰)에 모였을 때
붉은 보자기에 싸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금합(金盒) 안에서 해처럼 둥근 황금알 여섯 개를 얻었다.
반나절 만에 여섯 개의 알은 모두 사람으로 화하였는데 수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키가 9자[尺]이고 팔자 눈썹이며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는데, 처음으로 사람으로 화했기 때문에 '수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 달 보름에 9간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으며,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비로 삼았다.
왕릉 뒤편으로 들어서는 문.......
궁궐의 후원 같이 정원으로 꾸며져.........고목들이 있다.
시가지로 나오니...........
옛적 강냉이를 튀기던.....뻥.....뻥......뻥.....
그 소리가 정겹다.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은 마산~창원~진해를 통합하였다.
마산어시장을 돌아본다.
마산항의 야경................
마산아귀찜 거리...........
아귀찜은 마산이 원조라 한다.
아귀(구)찜...............
아귀찜은 아귀를 이용한, 한국 경상남도 마산에서 유래된 찜 요리이다.
원래는 아귀찜이나, 일반적으로 아구찜으로 불린다.
고춧가루와 다진 파, 마늘 등으로 매운 맛을 내고, 미더덕, 콩나물, 미나리 등으로 아귀와 함께 시원하고 개운한 맛을 낸다.
전통적인 마산 아귀찜은 말린 아귀를 위의 재료와 함께 양념에 섞어, 양념이 배게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냥 아귀를 내장을 제거하고 사용한다.
이 아귀라는 생선은 약 30년 전까지만 해도, 그 생김새와 쓰임새가 거의 없어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어부들이 선술집에 잡은 아귀를 가지고 술 안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탄생한 것이 아귀찜이다.
현재 마산 오동동을 중심으로 대표적 향토 요리로 사랑받으며, 전국에서 널리 사랑받는다.
마산시에서는 관광객 유치 홍보를 위해 아귀찜을 9경(景) 5미(味) 가운데 5미로 중 하나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거리 양쪽으로 아귀찜 집이 즐비하다.
꽤 알려진 집인듯 하여.....들어간다.
전분...고추장을 넣지않아...........담백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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