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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남도 유배길<전남 강진/영암>

하늘금2002 2011. 9. 16. 15:35

 

 

정약용 남도 유배길<전남 강진/영암>

 

 

 

1구간 :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

 

다산수련원에서 시작하는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은 대숲이 우거진 좁은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와서 생활했던 이곳은 다산 최고의 실학서인 목민심서부터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이 집필된 곳이다.

 

다산은 정조의 죽음 이후,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혼란스러운 한양으로 불려가 갖은 고초에 시달린다. 결국 다산의 큰형은 죽고, 그는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다산초당은 다산의 지치고 상처 입은 메마른 가슴과 몸을 추스르게 되는 장소가 된다. 다산의 굴곡진 인생처럼 굽은 나무뿌리들이 초당으로 오르는 숲길위로 드러난다. 곧이어 편백나무와 대나무로 이뤄진 짙푸른 숲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다산초당이 보이기 시작한다.

 

초당 뒷산의 나무들은 그가 제자들과 직접 심은 것으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곧은 자세로 하늘을 향해 솟아있다. 잠시 다산초당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으면 그가 손수 만들고 가꾸었을 공간속에서 조선시대 최고의 실학자이자 고고한 선비였던 다산 정약용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다산초당에서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다산 정약용. 그에게 이곳은 군주를 잃은 신하의 유일한 쉼터였을 것이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구강포가 한눈에 보이는 천일각에 도착한다. 구강포는 9개의 하천이 강으로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강진만의 옛이름이다. 다산은 수많은 배들이 오가는 구강포를 바라보며 그 배를 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와 그리고 어쩌면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을 형과 가족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천일각에서 조금 더 오르면 839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백련사에 도착한다. 고려 후기 귀족 불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백련결사운동의 본거지이자 8국사8대를 배출한 유서 깊은 사찰인 백련사. 300년에서 800년 된 동백나무 7천 그루가 숲을 이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무엇보다 다산은 이곳의 젊고 총명한 승려 혜장과 친구처럼 지냈다. 유교와 불교라는 결코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사상이 우정으로 맺어진 것이다. 백련사로 오르는 길. 동백꽃이 바다의 찬바람을 이겨내고 그 붉은 속내를 보이며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 바닥에 떨어진 꽃잎에 바닥까지 붉게 물들었다는 동백숲을 오가며 우정을 나누었을 두 사람의 깊은 속을 들여다본다. 또 매년 5월이면 다산 유적지 일대에서는 다산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기 위하여 ‘다산제’를 개최한다. 다산이 사랑한 강진의 차 품평회와 다산실학체험, 목판체험 등의 풍성한 프로그램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무엇보다 길손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호수 같은 구강포와 천관산의 풍광이다. 길 끝에서는 오랜 역사를 품은 백련사, 원교 이광사의 현판글씨까지, 고고한 천년고찰이 길손에게 단아한 미소를 건넨다.

 

백련사에서 다시 내려오는 길. 밭두렁과 억새밭을 지나면 개펄이 펼쳐진다. 바다 생물들의 터전인 개펄은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드는 곳이다. 해마다 8천 마리의 철새가 날아드는 강진만 개펄. 특히 겨울에는 큰 고니가 날아들어 여행자의 시선을 뺏는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한때는 최고의 포구였으나 이제는 그저 고즈넉한 풍경의 마을이 된 남포마을이 위치한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다산이 1년 반 정도 머물렀다는 제자 이학래의 집이 읍내에 위치한다. 강진읍내, 월출산의 산채부터 강진만의 수산물이 풍성한 이곳은 여행자의 주린 배를 저렴한 가격, 맛있는 음식으로 채울 수 있다. 특히 인심 좋은 주인아줌마, 아저씨의 큰 손에 여행자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다. 시기가 맞는다면 50년 전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강진 5일장도 구경할 수 있다.

 

장터 끝에는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이 머물렀던 주막집 ‘사의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산은 근방의 학동들을 가르쳤다. 땅 설고 물 선 강진 땅에서 다산이 처음으로 몸과 마음의 쉼을 청했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안정을 찾고 몸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는 네 가지 뜻을 세운다는 의미로 자신의 방에 사의재라는 이름을 붙였다. 많은 여행자들은 1구간의 끝인 이곳에서 다산처럼 막걸리 한잔으로 지친 다리에 쉼을 청한다.

 

차향기가 짙은 곳. 월출산 능선이 단아하게 내려앉은 그 끝에는 바다가 있는 곳, 강진만. 산과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이곳에서 세상의 단 하나뿐인 임, 군주를 향한 다산의 지극한 충심을 느낀다. 그리고 사색과 명상의 다산오솔길은 그렇게 우리를 겸손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준다.

 

 

 

2구간 : 시인의 마을길

 

사의재에서 다산을 만나고 돌아서면, 남도땅에서만 볼 수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좁은 골목길을 소담하게 장식하는 길을 지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조선시대 학동들을 가르치던 서당인 ‘금서당’과 마주친다. 일제 때는 소학교로 쓰이던 곳으로 한쪽은 팔작지붕의 한옥이, 다른 한쪽은 슬라브 지붕의 양옥이 자리한다. 이 학교는 강진이 고향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김영랑도 다녔던 곳으로 영랑은 이 학교를 다니며 항일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현재는 향토화가의 아틀리에로 개조되어 여유롭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예술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아래쪽에 남도 서정을 주옥같이 노래한 시인, 김영랑의 생가가 나온다. 지금은 사적지가 되어 수많은 여행자가 찾는 영랑생가는 당시 근동에서 알아줬던 부잣집이었다. 문간채와 안채, 사랑채까지 잘 갖춰진 곳으로 집안 구석구석 60여 편의 시에 스며있는 풍경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남도 특유의 꽃나무들, 초가지붕이 얹혀있는 단아한 모습, 소담스런 돌담과 장독대, 우물, 그리고 핏빛 같은 붉은 모란까지... 영랑이 느껴진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슬픔에 잠길 테요. (중략)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中

나라를 잃은 설움을 고운 시에 담아야 했던 영랑의 아픔이 시의 한구절 한구절에서 느껴진다. 집안 구석구석의 시비에는 이런 영랑의 마음이 깃들여있는 시들이 적혀있다. 많은 여행자들은 시비에 적힌 시어들을 읊조리며 집안 풍경을 둘러본다.

대청에 앉아있으면 영랑의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영랑의 생가에 모란이 활짝 피는 4월이면 영랑문학제가 개최된다. 작가들에게 영랑시문학상을 주는 것을 시작으로 시화전, 백일장대회, 시낭송대회, 모란예술제등이 진행된다.

 

집 뒤편에는 소가 누운 듯한 형상을 한 뒷산으로 향하는 좁은 오솔길이 있고, 구암정을 지나면 길이 나온다. 강진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산책로, 이곳에 흐르는 샘은 지금까지도 산책 나온 이들이 목을 축일만큼 맑다. 조금 더 가면 고성사와 보은산방이 보인다. 보은산방은 다산이 학연과 학유 두 아들을 가르치고 주역을 비롯한 경학 연구에 몰두했던 곳이다. 보은산방 주변은 무성한 이끼와 소나무가 가득하다. 소나무숲길을 지나면 송학마을의 고즈넉한 정자들이 여행자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이곳을 지나 목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를 걷다보면 성전달마지마을에 도착한다. 월각산 아래 자리한 전형적인 산골마을인 이곳은 작은 학교와 아이들의 해맑은 재잘거림, 도라지꽃과 앵초꽃이 길손을 환영한다. 예로부터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으로 집들이 모여 있다는 이곳은 살고 있는 학의 부위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학의 머리 쪽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가 많이 나오고, 배 근처에는 부자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성전달마지마을은 미리 신청만 하면 마을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한옥민박에서 묵으며 농촌체험을 할 수 있다.

 

같은 찻잎을 사용하고, 같은 온도의 물로 차를 우려도, 이상하게도 누구의 손길이냐에 따라 그 맛과 향, 깊이가 달라진다. 그것은 마음이 차 속에 녹아들기 때문일 것이다. 초록색으로 번져가는 시인의 마을길에서는 영랑의 시어들이 읊조리는 여행자의 마음마다 서로 다른 맛과 향을 품어낸다. 2구간 시인의 마을길을 걸으며 여행자도 시인이 되어 길 위로 마음이 녹아들기 때문이다.

 

 

 

3구간 : 그리움 짙은 녹색향기길

성진달마지마을에서 시작하는 남도유배길 3구간은 5시간 30분정도가 소요되는 그리 짧지는 않은 코스다. 성진달마지마을을 지나 목장 길을 걷다보면 월출산 무위사에 도착한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라 전해지는 무위사는 극락보전에 그려진 벽화가 화려하고 섬세한 고려불화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어 유명하다. 그러나 무위사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처럼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라고 한 표현이 아닐까. 그 입구에서부터 오랜 시간 비와 바람에 바랜 기둥과 벽이 운치 있다. 해탈문을 지나면 길게 잎을 늘이고 있는 배롱나무가 묘한 풍치를 자아내고, 평탄한 경내에는 화려한 단청 없이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 지은 가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국보 제13호 극락보전, 후불탱화인 백의관음도등의 유물들이 소박한 시간의 흐름을 품은 무위사를 더욱 운치 있게 한다.

 

무위사를 나와 왼쪽으로 산 아래를 돌아가면 다산이 초의선사 등의 지인들과 자주 찾았던 월출산 제일경, 안운마을, 백운동이 눈에 들어온다. 월출산 맑은 물이 구름으로 피어오른다 하여 백운동이라 불리는 이곳은 깊은 골짜기 구석구석 붉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 그 운치가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주변에는 넓은 차밭이 있다. 약 33만㎡의 다원으로 한 해 평균 165톤의 녹차를 생산하는 이곳은 키 낮은 차나무들이 월출산 능선과 함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찻잎들이 바람에 서걱거리는 소리는 여름에는 여행자의 이마 위의 땀을 식혀주고, 겨울에는 외로운 여행자의 가슴을 채워준다. 다산은 이곳의 차를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 극찬을 했다. 마시기도 전에 차나무에서 느껴지는 찻잎의 향이 풋풋하게 맴돈다.

 

차밭에서 나와 조금만 더 가면 월남사에 있었던 월남사지 3층석탑이 지고지순하지만 강건한 모습으로 여행자를 기다린다.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세워진 사찰이지만 월남사지 3층석탑은 백제시대의 형식을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천왕봉을 마주 올려다보고 있다. 준수한 탑신과 주변의 돌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3구간 여행자에게 길이 주는 큰 선물이다.

 

논길을 따라 오래된 마을을 지난다. 그리고 새로 난 길 때문에 사람들에게 잊혀진 누릿재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영암과 자누, 광주, 한양으로 이어지던 누릿재는 다산이 강진을 찾을 때도 넘었던 고개이며, 영랑이 강진을 떠날 때도 넘었던 그 고개이다. 이 고개에서 바라본 월출산은 다산의 눈에는 한양에서 봤던 도봉산과 닮아 ‘그 모습이 도봉산을 닮았으니 뒤돌아보지 말라’며 ‘누리령을 넘으며’라는 시를 남겼다. 가파르지 않고, 봄이면 노란색 유채꽃과 진달래가 흙길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걷는 이들은 쉬이 이 고개를 넘는다.

 

무엇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넓고 비옥한 영암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며 바람이 이마 위의 땀과 양 볼의 열기를 식혀준다. 내리막길은 편백나무들이 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자라있다. 그 곧고 높은 편백나무들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 누릿재의 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누릿재를 넘어 천황사에 도착하면 길은 끝이 난다.

 

강진에서는 매년 8월, 고려 500년 동안 고려청자를 생산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국보나 보물에 지정된 청자의 85%를 만들어낸 자부심을 가지고 강진청자축제를 개최한다. 고려청자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축제로 워크숍과 세미나, 전시회뿐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는 체험까지 마련되어 있다.

 

강진의 옛 이름은 탐진. 즉 제주(탐라)로 가는 나루란 뜻이다. 남도의 수많은 섬으로 오가던 배들이 드나들던 길목. 육지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다산은 우리나라 실학을 가장 발전시키는 시간을 보냈다. 자신의 주변을 오가는 수많은 생각을 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며 이곳에서 그는 무엇을 그리워했을까? 녹색의 향기 가득한 길 위로 그리움이 짙게 깔린다.

 

 

4구간 : 월출산 자락 기 충전길

남도유배길의 4구간 월출산자락, 기 충전길은 천황사에서 시작한다. 길 이름에서도 느껴지듯 이 길은 월출산의 울림을 발끝으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 그 첫 시작점인 천황사는 사자봉 아래 있다하여 사자사로도 불렸던 곳으로, 큰 불이 난 뒤 그 시대의 건축물은 소실되고 현재는 복원중이다.

 

이곳 천황사지 입구부터 이어지는 길이 바로 월출산 기찬묏길이다. 월출산 기슭을 따라 도는 7km의 이 길은 물과 숲이 있는 길을 걸으며 월출산의 큰 기를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월출산은 예로부터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그 모양처럼 기운이 솟는 산이라 여겨졌다. 각 골짜기마다 있는수많은 절터들 역시 그 믿음의 증거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마을과 논밭을 지나 오솔길로 이어지는 이 길은 월출산 바위의 80%가 맥반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걷는 것만으로도 건장해지는 길이다. 이 길을 걷다보면 성풍사터에서 무너진 채로 발견되었던 성풍사지 5층석탑이 복원되어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꼿꼿하게 서있다.

 

기와 건강을 주제로 한 웰빙테마파크인 월출산 기찬랜드가 다음 코스다. 기공치료와 기 건강체조를 체험할 수 있는 기 건강센터가 있으며 야외에는 산책로와 풀장 등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 월출산 맥반석 사이로 흘러나오는 계곡물을 막아 만든 천연풀장이 사람들을 기다린다.

 

이곳을 지나면 호젓한 산길이 시작되고 그 길에서 도갑사를 들릴 수 있다. 신라4대 고승 중 하나인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인 도갑사는 그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나무들이 입구에 줄지어 서있다. 길옆으로는 구림천 흐르는 소리가 우렁차다. 옛 승려들이 사용했던 돌 수조는 길이 5m로 옛 위용을 보여주며, 절 뒤쪽 탑비들이 서있는 오솔길에서도 역시 천년고찰의 분위기가 오롯하게 느껴진다. 도갑사에서 나와 3km정도 걸으면 왕인박사유적지에 도착한다. 백제시대 때, 바다를 건너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했던 왕인박사의 자취가 모여 있다. 그런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4월 왕인문화축제가 개최된다. 왕인의 무덤이 있는 일본의 히라카타와 한일 문화예술단이 참가하여 왕인박사의 도일 의미를 되새기고, 유적지를 중심으로 백제의상패션쇼, 민속놀이, 퍼레이드 등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한다.

 

쉬엄쉬엄 걷다보면 삼한시대부터 마을을 이뤘다는 구림마을에 도착한다. 그 세월만큼 크고 깊은 마을이다. 도선국사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 전통마을로, 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민박집들이 조성되어 있으며 계절별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도 할 수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을 안에는 깊은 역사만큼 오래된 고택과 소나무, 사우와 저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들어서서 여행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돌담을 따라 남도 사람들의 오랜 삶의 정취가 느껴진다. 그 중 고죽 최경창의 집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조선 8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최경창이 출세하기 전까지 20년을 살아온 곳으로 400년이 지난 지금도 해주 최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집 주변에는 최경창과 그를 연모한 기생 홍랑이 서로 주고받은 연시가 비석으로 세워져 절절한 마음을 전한다. 400년 동안 조상들의 흔적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지친 하루의 피로를 따뜻한 구들장에서 풀어버리며, 내일을 기약한다. 마을 내에는 영암도기박물관도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남도답사 1번지 강진. 동백꽃이 붉게 속내를 드러내고 철새들이 쉼을 취하는 곳. 강진에서 영암으로 걷는 이 길은 오래된 옛 이야기가 말을 건네는 곳이다. 월출산 높은 산자락, 창호지 문창살에 어리는 달빛을 감상하며 월출산의 큰 기를 충전하자!